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정도전(드라마)/시대 재현 (문단 편집) == 기타 == [[http://blog.naver.com/alsn76/40205413032|정도전의 역사와 차이 문제를 지적한 포스팅]][*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samka999&logNo=130190696765&parentCategoryNo=&categoryNo=&viewDate=&isShowPopularPosts=false&from=postView|이 포스팅에 대한 주요 비판 링크]] [[http://cafe.daum.net/shogun/1Db/6594|주인장의 다른 글에 대한 역덕들의 반응 1]] [[http://rozanov.egloos.com/1362065|반응 2]]] 점고 받는 장면, 고려시대엔 없던 평민들의 염색된 옷, [[사과]], 현대적인 전통가옥 양식, 원래 4개 피워야 하는 봉수대, 그 시대에 없었던 [[주리틀기]]에 대한 점을 세세히 지적하고 있다. 단 위의 링크는, 학계에서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3FbizName=MK%26seojiId=kc_mk_a003%26noUpSeoji=%26gunchaId=av028%26muncheId=01%26finId=010%26guboonNodeId=seoji%26NodeId=mk_s_ga|《고려도경》의 관련 기록]]에 의거하여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304041&cid=717&categoryId=717|고려 시대 서민 가옥에는 일반적으로 구들이 있었고 상류층 가옥은 그렇지 않았다고 보는 것]][* 상류층은 조선 전기까지 휘장과 장막을 쳐서 찬바람이 스며들어오는 것을 막고, 융단을 깔아서 찬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막았다.]과 거의 반대로 설명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단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796471&cid=4430&categoryId=4430|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 시대 가옥에서 방 전체를 데우는 전면온돌은 고려 중기 즘에 보편화되므로 전면온돌이 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또한 일률적으로 규정하기 힘들거나 뚜렷하게 밝혀지지 않은 고려 말기 호송관의 무장 상태, 가체의 크기, 서민 집의 방 크기나 한 끼 식사량, 나무 숟가락의 크기와 모양 등에 대해 단정지어 말하는 경향이 있고, 그밖에 조선 말 기산 김준근의 풍속도를 놓고 극중 압슬형 묘사의 타당성을 논하거나 [[http://blog.daum.net/borisusknag/11495555|2007년 이후]]에 [[http://cafe.daum.net/dasi10/7Gh6/3262?q=%C1%A4%B5%B5%C0%FC+%BC%D2%C0%E7%B5%BF+%C3%CA%BB%E7|복원]]된 [[나주]] 정도전 유배지의 초사(草舍)를 당시의 건물로 착각하는 등의 문제도 많으므로 적당히 걸러서 보기 바람. 한편 2010년대 들어 사극에서 외국인들이 그 나라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늘고 있는데 여기서도 명나라 사신이 [[중국어]]를 사용하고 역관을 통해 고려인들과 대화하는 등의 모습도 발견된다. 2008년 [[대왕 세종]]에서도 명나라 사신이 중국어를 사용했다. 그리고 왜구 또한 [[일본어]]를 사용하면서 언어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 다만 일본병사가 아기발도를 [[쇼군]]이라고 칭한다거나, '쏴라!'를 '우테!'로 직역한 건 좀 옥에 티.[* 쇼군이 아니라 '토노(殿, 주군)'라고 불러야 맞음. 또한 撃つ는 근현대 격발식 화기의 방아쇠를 당긴다는 뜻으로 원거리 냉병기 및 점화식 화기의 사용에는 放す를 썼으니 실제로는 '하나세!'라고 해야 맞다.] 극중 이성계가 [[동북 방언]]이 아닌 [[서북 방언]]을 사용하고 있다. '솜망방이 처벌'이라던가 그 시대에 등장하기 어려운 용어의 사용이 지적받는다. 예를 들어서 정도전이 편전에서 북원과의 화친에 반대하는 말을 할때 민족혼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 말은 19세기 일본에서 만들어진 용어다. 자세한 것은 [[민족]] 문서 참조. 기타 자잘한 오류로는 이성계 막사에서 한반도 모양 호랑이가 그려져 있는 그림을 들 수가 있는데 애시당초 저런 그림이 나온 것이 근대에 들어와 일본인들이' 한반도를 토끼라 카더라' 라고 한 것에 반발하여 '사실은 호랑이다'라고 주장한 것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저 시대엔 존재할 수가 없다. 또한 북원이라는 단어도 문제가 되는데, 당시 사용한 용어가 아니라 후대에 사용된 역사학적 명명일 뿐으로 당시에 쓰인 예를 고려사 사료에서 찾아보기 어렵다. 최영이 요동 정벌을 강행하면서 말하는 '[[사대주의]]'라는 용어도 이와 마찬가지. 5화에서 정도전이 유배를 가는 장면은 예능 프로그램인 [[렛츠고 시간탐험대]]를 떠올린 사람들이 꽤 있는듯하다. 여기서도 보수주인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러하고. 사실 사극에서 보수주인이 나온 건 정도전이 거의 최초라고 봐도 좋다. 뭐 여기의 보수주인은 나이도 지긋하고 시간탐험대의 보수주인보단 착한 사람이긴 하다. 사실 시간탐험대에서도 나온 얘기지만 돈이 있다면 말이나 당나귀 등의 탈 것을 구매해 타고 갈 수도 있었다. 거기서는 돈이 없다는 설정을 해서 생고생을 해서 그렇지... 칼을 안 찬 것은 배우의 안전문제 때문일듯. 어쨌든 그동안 유배객의 단골 탈 것이었던 소달구지가 안 나온 것만 해도 역사 재현의 진보. 23화에서 이인임이 유배 갈 때는 고전적인 방법(...)을 썼으나, 이 때는 남은을 통해 "저게 다 백성들 보라고 일부러 저러는 거요"로 못박아두어 논란은 대충 피해갔다. 조리돌림과 유배행렬을 합쳐놓은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 뒤부터 계속 아무 설명 없이 소달구지가 나오는 걸 보면 그냥 익숙한 걸로 가자고 정한 것 같기도. 뭐, 주리 틀려서 하반신이 만신창이가 된 사람이 멀쩡히 말타고 가는 것도 말이 안 되긴 한데 문제는 주리도 고려시대 형벌이 아니다... 참형은 원래 귀에다 화살을 꿰고 죄인을 엎드리게 하여 고정시킨 다음 큰 칼로 집행하는게 일반적이었지만, 본 사극에선 그런 모습이 재현되진 않았다. 뭐, 한국사극에서 원래 제대로 참형이 재현된 것이 거의 없긴 하지만. || [[파일:attachment/정도전(드라마)/고증/sapae.png|width=500]] || [[파일:external/www.myungtong.com/list7h1-1.gif|width=300]] || 7화에서 나주 마름이 정도전에게 내보인 사패문서에 찍힌 [[옥새]]는 원래 '''[[세종대왕]]의 어보'''(…)이며, 이런 어보는 임금이 승하한 후에 제작을 한다. 80년 후에야 만들어지는 어보를 가져다 찍어놨으니 빼도박도 못하는 오류. 전라도라면서 [[광주시|廣州牧]]이라고 적어놓기도 하였다. 또한 위 문서에서는 연도 표기를 [[간지]]로만 적었는데, 국왕의 결재를 받은 공식 행정문서에 들어가야 할 '○○ ×년'이란 형식의 중국 황제 [[연호]]가 누락되어 있는 것 역시 오류. || [[파일:attachment/정도전(드라마)/고증/joonsapae.jpg|width=350]] || [[파일:attachment/정도전(드라마)/고증/1399sapae.jpg|width=350]] ||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패문서로 알려진 보물 제1135호 조온(趙溫)의 사패문서(1399년, 좌측)와 보물 제899호 조흡(曺恰)의 사패문서(1401년, 우측). [[조선왕조실록]]에는 국호를 정한 직후인 태조 때 '조선왕보(朝鮮王寶)'를 만들어 사용하다가 태종 때 명나라가 책봉 고명을 허가한 후 '조선국왕지인(朝鮮國王之印)'이란 글자가 새겨진 옥새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좌측 문서에는 조선왕보, 우측 문서에는 조선국왕지인이 찍혔음이 확인된다. [[고려사]] 여복지에 공민왕 시기인 1370년 5월, 명 태조 [[주원장]]이 거북 모양의 옥새를 고려에 보내주었고, 거기에 '고려국왕지인(高麗國王之印)'이 새겨져 있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기사가 드라마의 시대배경과 일치하는 만큼 저 사패문서에도 역시 '고려국왕지인'이 찍혀 있어야 역사에 맞다. 여기에다 27회에서 개경 도성에 붙였던 조민수와 이성계를 삭탈관직하고 토벌할 것을 적은 칙서 방문에 찍힌 옥새는 [[문종(조선)|문종]]의 어보. 그외 옥의 티라면 티인데 19화에서 임견미 역의 정호근 씨의 소매자랏 속에서 깔깔이로 추정되는 노란색 내복이 보인 것이 잠시 화제가 되었다. 진품명품에서도 전문가들이 정도전의 역사 재현 묘사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http://youtu.be/U_jk8knQlfY|#]] [[내시]]의 경우, 공민왕, 우왕을 모시는 강내관, 창왕, 공양왕을 모시는 김내관 등의 내관들은 모두 수염을 기르고 있어 환관이 아닌 것으로 묘사되지만, 고려시대 말기에는 이미 몽골의 영향으로 왕실에서 [[환관]]이 널리 쓰이고 있었고 사실상 내시부=환관과 같은 상태였다. 그런데 고려시대 내시는 환관이 아니라는 일반론을 과도하게 따랐는지, 고려 편까지는 [[수염]]을 기르고 나오던 [[내시]]들이 조선시대 편부터 갑자기 수염이 없어지는 기묘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양 천도 이후에도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이 5명인 걸로 나온다. 원래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은 6명(진안군 이방우, 영안군 이방과, 익안군 이방의, 회안군 이방간, 정안군 이방원, 덕안군 이방연)인데 진안군 이방우는 1393년 사망했고 덕안군 이방연은 아예 조선 건국 이전에 죽었기 때문에 5명이 아닌 4명이 나와야 맞다. 이방우의 경우 그의 사망을 나레이션으로까지 언급하였으니 이 때 나온 한 명은 덕안군 이방연으로 염두에 두고 출연시켰을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